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 (문단 편집) === 남베트남에 대한 부적절한 개입 === 남베트남에서 실제로 지도자 위치에 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결점을 가지고 있었고, 반드시 누군가의 견제가 필요했다. 남베트남의 민주주의 발달 미진으로 인해 내부 견제가 불가능한 만큼 지도자가 폭주할 때는 미국이 적극적으로 견제할 필요성도 있었는데 미국의 조치는 부적절한 일이 많았다. 1954년에 베트남국 총리, 1955년에는 공화국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여러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고 1955년 후반기부터 독재자로 각성했다. [[레꽝빈]] 같은 극심한 반정부 성향을 가진 종교파 군벌들을 적대하는 건 어쩔 수 없었을지 모르나, 이들도 엄연히 베트남 서부에서 나름의 세력을 가지고 베트민을 막아내던 인물들이니만큼 이들의 세력을 동맹 종교파 세력인 혁명위 인물들의 휘하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라도 했어야 하는데, 응오딘지엠은 그러기는커녕 동맹 종교파인 혁명위조차 권력 장악을 위해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수십 년간 남베트남 남서부에서 반공주의의 요새가 되었던 세력들이 친정부 반정부 세력 가리지 않고 쓸려나가면서 남서부는 베트콩의 자동문이 되어버렸다. 1963년의 [[틱광둑]]의 소신공양 사건으로 대표되는 불교계 대규모 탄압은 1963년에 갑자기 빵 하고 터진 것이 아니다. 이미 1955~1956년에 있던 종교파 종교, 즉 호아하오교와 까오다이교에 대한 탄압이 불교 쪽까지 확대된 결과물일 뿐이다. 종교파 숙청 이후로 응오딘지엠의 업적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부패와 매춘을 금지했으며 경제성장을 이끌어 행정 부분에선 나름 성과를 내세울 만한 지도자였다. 그 증거로 응오딘지엠 재임 4년 만에 쌀 생산량은 200만 톤 넘게 늘고 고무농원은 거의 1,000개 가까이 늘었으며, 대단위의 유리공장과 직물공장이 남베트남에 들어섰다. 수산물 수출량도 크게 늘었다. 80만에 달하는 월남민의 존재로 경제가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성장했다는 소리인데 이거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다. 응오딘지엠이 베트남 남부에서 이런 성공을 일구고 있는 동안 [[호치민]]은 중공 고문단의 말만 듣고 유혈과 폭력이 난무하는 중공식 엉터리 '대약진 운동'을 시행했다가 정권이 결딴날 뻔 했다. 참다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이는 정규군 사단까지 동원한 초강경 진압으로 마무리된다. 이 때문에 호치민은 자아비판을 하였고 반중성향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정도로 차이가 난것은 애초에 호치민이 중국말만 믿고 병크를 터트린것도 크지만 그당시 남베트남은 미국의 무한 지원과 그당시 상당히 잘먹히던 개발독재이론등으로 상당한 성장을 거두었다.물론 개발독재는 나중가면 약발이 떨어지고 민주주의 체제로 변화되어야만 하는 사상이었지만 그당시에는 '''경제적'''으로는 효과가 있었다.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건 미국의 지원으로 이걸 잘써먹기도했다.물론 막판으로 갈수록 부패로 찌들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문제는 응오딘지엠은 군사 부분에선 문외한이나 다름없었고, 이게 문제가 되어 베트남군의 막장화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공산당과 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토지개혁에 미진하고, 남베트남군의 쿠데타를 우려해 장교 인사를 능력 위주로 하기보다는 친구와 친족, 가톨릭 교도들로만 도배했다. 그가 이런 것에 이유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 공동체는 베트남 공화국에서 가장 對베트콩 조직화가 잘 되어 있었다.([[https://www.nytimes.com/1970/08/16/archives/ruff-puffs-vietnamese-militia-hunt-enemy-by-night.html|뉴욕타임스 기사]], [[https://m.dcinside.com/board/war/1304325?headid=&recommend=&s_type=all&serval=베트남|번역]]) 그러나 애초에 종교 자체가 공산주의와는 상극이었으니만큼 가톨릭이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반공 성향이 매우 강했다. 종교파의 양대 구성원인 까오다이, 호아하오교는 55년까지만 해도 훗날 베트콩의 침투로가 되는 남서부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을 가장 강력하게 막아내던 세력이었기에, 무슨 종교든 간에 제대로 된 무장투쟁 조직화가 되어 있기만 하다면 반 베트콩 투쟁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종교 모두 지엠의 극심한 탄압에 그 여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즉 가톨릭이 가장 잘 반공조직화된 종교였던 건 원래 그랬던 게 아니라 응오딘지엠이 나머지 반공 성향 종교들의 조직력을 박살내버린 결과물에 불과하다. 정규군을 다룰 때조차 군사적인 무능함은 여실히 드러나서,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사상자를 지나치게 많이 낸 장교들은 승진시키지 않는 등(작전이 성공적이었어도!) 책상물림 독재자의 전형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다. 즉, 남베트남 패망의 근원인 베트콩의 준동은 50넌대 중반에 이미 뿌리가 잡힌 것이다. 당장 반공주의 세력의 핵심 중 하나였던 까오다이교의 근거지였던 떠이닌 성이 60년대 중반 이후로는 베트콩이 드나드는 통로로 전락한 것만 봐도 이게 얼마나 심각한 실책이었나가 잘 드러난다. 이렇듯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 패망의 근원을 만든 독재자가 맞았고, 미국도 이런 판단에 따라 1963년 쿠데타를 지원해 지엠 정권을 무너트렸으나, 역설적이게도 지엠이 무너진 이후로 남베트남은 오히려 더 깊은 수렁의 패배에 빠지게 된다. 그 이유는 바로 이미 응오딘지엠 외에는 제대로 된 반공주의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1955년 초반 응오딘지엠의 대체재로 주목받던 [[찐민테]]는 배후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암살자에게 당해 사망했고, 바로 몇 개월 뒤 남은 종교파 지도자들은 권력 장악의 야망을 드러낸 응오딘지엠에게 숙청당해 체포당하거나 캄보디아로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지엠을 전혀 제재하거나 항의 한번 안 했고, 숙청당한 종교파 지도자들이 전부 캄보디아로 도망간 걸 보면 미국 쪽으로 망명시키지도 않은 모양이다. 즉 미국은 55년에 대체자들이 아직 존재할 때는 아무것도 안 해놓고, 8년 뒤 지엠 체제가 막장에 이르자 뒤늦게 대체재를 찾아 헤맨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인물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응오딘지엠 축출 이후 2년 만인 1965년 남베트남은 사실상 캄보디아나 아프가니스탄의 친소 공산정권과 유사한, 외국의 개입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무력한 괴뢰국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진입했다. 추가로 미국은 남베트남의 고위 관료들이나 고위 군인들이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으면 막대한 뇌물을 제공해 부패시켰고, 이는 남베트남 정부의 전반적인 능력 저하와 남베트남 사회의 부패 풍조 만연,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각한 민심 이반을 유발해 패망에 일조했다. 전장에서의 전투만큼 후방에서의 정치가 중요했던 베트남 전쟁의 특수성을 생각한다면 미국 케네디 행정부의 응오딘지엠 제거는 자폭이나 다름없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분명 문제가 많았으나 최소한 응오딘지엠 치하 남베트남은 괜찮은 치안과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를 갖춘 그런대로 살 만한 나라였다. 미국이 만든 실책은 몇 가지 더 있는데, 그중 하나는 전면 개입 결정 이후 [[베트남 공화국군]]을 철저히 불신해 미군기지 경비 같은 임무만 주고 전투 임무는 미군 주도 연합군이 떠맡도록 한 것이다. 남의 땅에서 남의 전쟁을 전적으로 하는데 미국민과 미군의 사기가 오를 리가 없었고, 이는 미국 내 반전 여론 확대로 이어져 베트남전 패전으로 이어진다. 미국의 오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군은 북베트남군이 보급로로 이용하고 있다는 이유로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무차별적으로 폭격했고, 사용된 폭탄의 양은 태평양 전쟁 당시 쓴 폭탄의 양보다도 몇 배는 많다. 그래도 호치민 루트가 폐쇄되지 않자 국경을 넘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보내서 침공하기까지 했다.(물론 교전대상은 [[라오스군]]이나 [[캄보디아군]]이 아니라 라오스, 캄보디아 내의 북베트남군과 두 국가들의 공산반군들[* 파테트라오, [[크메르 루주]]]이었다)이었다. 특히 미군이 캄보디아에 퍼부은 폭격으로 인해 20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죽었고, 이 때문에 캄보디아에서는 반미 여론이 높아져 크메르 루주 같은 공산주의 세력이 크게 힘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건 소련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아프간 침공]]과 동급으로 심각한 일로 라오스와 캄보디아 둘 다 비동맹 중립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약소 중립국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폭격 일지를 조작하고 언론을 통제해 자국민에게까지 이 사실을 숨겼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이 사실이 드러나자 미국민의 반전여론은 말 그대로 불타올랐고, 이는 남베트남의 패망으로 이어진다. 남베트남뿐만 아니라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북베트남과 중국이 이를 계기로 자국 내 공산주의자들을 본격적으로 지원하면서 공산화를 피할 수 없었고, 캄보디아의 경우에는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대학살인 [[킬링 필드]]까지 겪어야 했다. 물론 라오스는 몰라도 베트남 전쟁 끝나고 캄보디아는 태국과 북베트남에 불신을 사고 특히나 친소정책을 펼친 북베트남에 배신 때려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